아내는 스쿠버다이빙 나가고, 외이도염이 낫지 않은 나는 혼자 리조트 식당에 앉아 있다—다리와 팔에 모기를 물리며. 식당 앞 중국랜턴나무에는 박쥐가 드글드글 매달려 있다. 재잘대는 녀석, 이곳저곳 옮겨 날아다니는 녀석, 과일을 신주단지 마냥 끌어안고 먹는 녀석,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나무는 모든 박쥐를 먹일만큼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덕에 박쥐들은 여유롭고 인간인 나는 서글프다. 박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나무 뒤로 넘실대는 파도처럼, 살랑이는 바람처럼, 리조트 직원의 쓱-싹 빗질처럼, 어떠한 운율을 갖고 지껄인다.
외이도염을 앓은지는 5개월이 되었다. 스쿠버다이빙 후 귀이개로 귀를 후빈 게 잘못이었다. 발병한 뒤로도 이를 가볍게 여기고 계속 물놀이를 하고 술을 마셨다. 그러니 오늘까지도 완치되지 못해 산호초 생태계라는 왕관의 보석이라고 자부하는 타베우니에서 다이빙 하지 못하는 것은 공정한 처사다.
외이도염에 안 걸렸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쁘기만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외이도염 때문에 피지 보건 서비스를 직접 여러 차례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보건 사업 담당자이지만 내가 하는 경험은 사업관리자로서의 경험이다. 사업관리자의 경험과 보건서비스 이용자의 경험엔 유격이 있다. 외이도염이라는 작은 병이지만 피지에서는 쉽게 치료되지 못한다. 거의 모든 병원에 전문의가 없다. 귀에 넣을 면봉이 없어 염증 샘플을 채취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구할 수 있는 약품도 제한적이다. 대신 항생제 처방만이 질적으로 양적으로 푸짐하다. 이러니 나 역시 병원에 발길을 끊은 시기도 있었다. 피지인들이 병원에 잘 가지 않는 것도 비슷한 연유일 것이다.
보건서비스를 경험하게 된 것 외에도, 더 자주 뵙고 싶었던 한국인 의사 선생님을 자주 찾아 뵐 이유가 되어서 좋다. 일주일에 세번씩 낮에 진료를 받고 회사로 돌아와 그 시간만큼 대체 근무를 한다. 진료는 10분이면 끝나지만 회사와 병원을 왕복하는 게 20분 걸린다. 진료 받은 시간 대체 근무하는 것과 왕복 이동 시간 대체 근무하는 건 묘하게 달리 느껴진다. 이전에 봤던 아픈 동료들도 이랬겠구나 싶다.
물에 들어가질 못하니 여가활동의 구성이 대거 조정된다. 테니스를 더 치고 책을 더 읽는다. 언젠가부터 삶의 신조는 팝송 가사인 “the best of us can find happiness in misery” 이다. 스쿠버다이빙 나가지 못한 대신 식당에서 글을 쓰며 아내가 가져올 소식을 기대한다. 외이도염 걸린 대신 피지 보건 서비스를 경험하고,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을 자주 뵙게 되고, 과거와 미래의 아픈 동료를 더 이해하게 됐음에 만족한다. 21세기는 불행하다.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빙산이 녹아내리고, 미세먼지가 하늘을 덮고, 플라스틱이 알바트로스의 배를 채우고, 우리는 대량 실업한다.
그런 21세기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행복은 독서다. 누군가는 전자책을 싫어하거나 어색해하지만 나는 좋다. 핸드폰 하나에 책을 수십권씩 쌓는다. 밑줄쳤던 내용을 다시 찾아 보기도 너무 쉽다. 책 읽다가 그 책이 설명해주는 것보다 더 깊이 찾아보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 구글에 찾아볼 수 있다. <모비딕>을 읽다가, <법률론>을 읽다가, <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읽다가, <Three Tigers, One Mountain>을 읽는다. 법무사에 대해 알아보다가, 삼각함수를 알아보다가, 하마 고기를 알아보다가, 이스라엘 역사를 알아본다. 나중가서 뭔가를 읽고 있자면 어쩌다 이걸 읽고 있지 싶다. 그러면 왔던 길을 돌아가 보며 지금까지 읽은 것들의 연결성을 확인한다. 그럴 때면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연결성, 지성 세계의 웜홀을 나 홀로 발견한 것 같아 무척이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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